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달살기 "quote"

  • 처음 보는 아이와 친구가 되다
    • 그깟 나들이 좀 나왔다고 아이의 견문이 넓어지길 바라는 것도 웃기잖아. 아이의 24시간 유익한 것으로만 채울 수도 없고, 채울 필요도 없는데 왜들 그렇게 아등바등할까. 그냥, 즐거우면 되는 거 아냐? 그런데 어어? 막상 오니까 눈에 보일 정도로 뭔가가 변하는 거다.
    • 얼도탕도 않은 농담을 하거나, 투닥거리고, 시시껄렁한 무서운 이야기 따위를 하며, 사이사이 3분마다 한 번씩 싸우느라 웃느라 정신없다. 결국 "너희는 떠들어라, 엄마는 음악이나 좀 들어야겠다"하고 애 낳은지 9년만에 처음으로 나를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 그것도 클래식 채널. 푸하하
    • 아침 내내 점토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오늘은 뭐하고 싶니? 또 바닷가 갈까?" "아니, 도서관 갈래." 꽃님이가 제 입으로 도서관에 가겠다고 한다.
    • 평소 꽃님이를 보노라면 낯가림이랄까, 지나친 긴장이랄까 그런 부분이 있어 늘 걱정스러웠다. 만나자마자 금방 떠들썩하게 어울리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만나든 좋은 관계를 맺으라는 것도 아니다. 수줍음이 많거나 내성적인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꽃님이는 겉으로 보면 명랑하고 활발한 편이라서 낯선 사람 때문에 표정이 굳으면 상대방이 당황하는 것이다.
  • 아이들을 사로 잡은 건?
    •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면, 늘 예상과 어긋난다. 남들은 사진 한 장 찍으면 끝나는 곳에서 한 시간을 보낸다든지, 좋아할 줄 알았던 곳에선 언제 집에 가냐고 투덜거린다든지. 예상과 반응이 달라서 더 즐겁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 "자, 이제 엄마가 커피 좀 편하게 마시게 너희는 나가 놀지 않을래?" 아이들에게 색깔 풀을 꺼내 주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책을 읽고 쉬다가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꽃님이가 그린 바다의 색깔이 엄마의 촬영기술로는 잡아내지 못한 딱, 그 바다의 색깔이었다. 꽃님이와 꽃봉이가 제주도에 온 후 그림으로 엄마를 여러번 놀라게 한다. 둘다 만들기는 좋아해도 그리기는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시키지 않아도 여러 번 놀라게 한다. 둘다 보니, 새삼스레 여행이 아이들에게 굉장히 자극이 되는구나 싶다. 꽃봉이도 쓱쓱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 같지만 제목을 물어보면 그럴 듯하다. 오늘 그림의 제목은 '용암이 흐르는 언덕'이라나.
    • 엄마는 옛날부터 산도 숲도 바다도 싫었어. 그냥 보는 것만 좋고, 내가 그 안에 들어가는 건 싫었어. 덥도 힘들고 지저분해서 말이야. 그런데 아기를 낳고 나서, 그 아기에게 세상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그만 반해버린 거야. 나무도, 숲도, 바다도, 강도, 빗물도, 언덕도, 산도, 풀도, 벌레도. 너무너무 좋더라. 고마워 꽃님아. 꽃봉아. 계속 얼구 찌푸리지 않고, 금방 소라게와 고동, 작은 게에 반해줘서. 집에 가기 싫다고, 더 잡고 더 놀다 가자고 해서 고마워. 물에서 만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서 고마워. 금방 즐거워해서, 오늘 참 행복하다고 말해서, 내일 또 오자고 말해서 정말 고마워.
  • 일정 짜기 놀이
    • 여행에선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일상의 단조로움 따위는 없다. 쉴 새 없이 내가 무엇을 원하고 할 수 있는지 결정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 것 같다. 내가 한 선택을 쭉 모아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눈에 들어온달까?
    • 학교 다닐 때 단어장으로 많이 썼던 링 메모장. 일단 좋은 곳이 눈에 뛸 때마다 메모지에 썼다. 뒷장에는 근처 맛집이나 유의할 점 등을 쓴다. 특히 블로그 맛집 소개 같은 건 동네인지 금방금방 들어오지 않아서 일단 이렇게 적어놓는 것이 아주 유용했다. 가령, '어짓이네 횟집'이라고 하면 일단 보목포구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메모지에 쓴다. 그 후에 지도에 보목포구 위치를 확인한 후에 서귀포 파트에 메모지를 끼워 넣으면 되는 것이다.
    • 이렇게 좋은 곳을 잔뜩 써놓은 메모지 한 묶음으로 카드놀이를 꽤 자주 했다. 비가 올 때 갈만한 곳, 흐린 날씨에 가면 좋은 곳, 밤에 가면 좋은 곳, 이렇게 저렇게 나눠서 목록을 만든다. 그러면 제주도립미술관은 '1100도로 넘어가는 코스'에도 속하고, '비가 오는 날 가기 좋은 곳'에도 속한다. 아, '너무너무 더운 날' 리스트에도 넣었다.
    • 어른들끼리 다니거나 애가 좀 컸으면 비가 오건 말건, 덥건 말건 어지간하면 일정대로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릴 땐 이런 리스트가 꼭 필요하다. 엄마 생각엔 삼굼부리를 봤으니 가까운 비자림에 가면 좋겠지만, 아이가 잠들어버리면 어쩌겠는가. 한숨 재울 수 있게 한 시간쯤 드라이브하면 좋을텐데. 그럼 한 시간 쯤 떨어진 곳에 갈 만한 데가 있는지 찾아서 일정을 급하게 변경해야 한다.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면, 어른은 일정대로 구경을 다닐 수도 있고, 창 넓은 찻집에 가서 음악을 들어도 좋겠지만 어린 여행 파트너는 다른 일정을 요구한다. 실내이면서도 액티브한 곳이 어디 있을까? 그래, 유리의 성에 가서 컵 만들기 체험을 해야겠군. 이런 식이다.
    • 비오는 날 가기 좋은 곳
      • 제주 자연사 박물관, 유리의 성, 트릭아트 뮤지엄, 테지움 등 실내 테마파크, 해안도로 드라이브
    • 밤엔 뭐하고 놀까?
      • 해질녘 풍경 좋은 곳 - 사라봉, 차귀도, 송악산, 모슬포
      • 해 지고 나면 - 제주 별빛누리 공원, 탑동 공원에서 자전거 타기, 롯데호텔 화산쇼, 천지연 새섬 야경 보러가기, 극장 가기, 테디베어 뮤지엄(8시, 성수기 10시까지), 공룡랜드 야간 개장, 야간 개장하는 해수욕장은 협재, 이호 테우
    • 흐린 날을 놓치지 말자
      • 올레길 걷기(아이들이 걷기엔 5코스, 6코스 추천), 한라산 등반(영실코스가 제일 단거리), 성산일출봉 등반
    • 여행에서 정보는 양날의 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여행기와 여행지에 대한 정보 포스트가 다양하다 보니 개인으로 다니면서 패키지처럼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시간 낭비하지 않게 거리며 교통이며 다 고려해서 누군가가 딱 짜놓은 스케줄을 따라다니면 된다. 이러면 맛없는 음식점에 가서 기분 나쁠 일도 없고, 여행지에서 귀한 시간을 길바닥에 버릴 일도 없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고 읽는 추리소설도 아니고, 그런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의 여행을 복제한 여행이라니! 기껏해야 여행의 모험이란 게 가이드북의 저자와 나의 취향이 비슷한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 뿐이라니! 그나마 그 정보를 온전히 신뢰할 수도 없다.
    • 나는 캐릭터가 드러난 여행기를 좋아한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그 사람이 선택한 정보를 얼마나 받으들일 건지 선택할 수 있다. 아기 엄마에게 필요한 여행정보와 싱글남자에게 필요한 여행 정보는 완전히 다르니까.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읽는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자체를 추억하는 여행기도 그 사람의 개성이 드러난게 좋다. 하지만 요즘엔 예쁜 사진 한장에, 감상인지 철학인지 사춘기의 낙서처럼 몽롱한 여행기가 대부분이더라.
    • 자, 이제 내가 선택해야 한다. 가이드북의 정보를 따를 것인가, 나의 느낌을 따를 것인가, 무시할 것인가. 택시를 탈 것인가, 버스를 탈 것인가, 걸어갈 것인가. 돈을 선택할 것인가, 기회를 선택할 것인가. 여행에선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일상의 단조로움 따위는 없다. 쉴 새 없이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얷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 것 같다.
    • 내가 한 선택을 쭉 모아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눈에 들어온달까? 내가 취향에 따라 선택을 하고, 내 선택을 보고 내 취향을 안다. 나는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이 여행의 순간순간마다 일어난다. 여행의 루트를 짜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 체험 얼마만큼 할까?
    • 꽃님 아빠와 가장 같이 하고 싶은 일은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같이 보느 것이었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너무나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뛰어오는 모습을, 그 웃음 소리를 함께 듣고 싶었다. 최고의 노후 대책은 나중에 늙어서 우리가 그때 그랬지 하고 같이 추억하는 순간들을 만들어두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에라~.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지는 데 딱 24시간이 걸렸다.
    • 한때는 나야말로 각종 체험전시 마니아였다. 꽃님이가 다섯 살 때 가장 열심히 쫓아다녔던 것 같다. 아이에게 뭔가 살아있는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서 일주일에도 몇 군데씩 다니고 공연과 전시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꽃님이가 정작 은행을 가본 적도, 재래시장을 가본 적도, 우체국을 가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싼 돈 들여 직업 체험을 하고 있더란 말이지. 부침 개 부칠 때 한 국자만 떠 넣게 해도 충분히 좋아하는 걸, 엄마가 요리할 떄는 청소거리 생기는게 싫어서 텔레비전 틀어주고 엄마 근처에 오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주제에 돈 들여 요리 체험은 얼마나 많이 다녔던가. 엄마가 열심히 일상생활을 하고, 아이는 따라다니기만 해도 충분한 것을, 다만 엄가 아이의 눈높이에서 귀찮아하지 않고 설명해주고 보여주면 되었을 것을 왜 구태여 돈을 들여 따로 어딘가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 밀가루도 그저 만질 만하고 주물럭거릴 만큼이면 충분하지, 먹을 것도 모자란 판에 구태여 방 한가득 밀가루로 산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렇게 규모가 큰 즐거움에 익숙해지고 나면 아이는 더 이상 한 추먹의 콩으로는 즐겁게 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이후로 체험관은 거의 다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요새는 밖에서 놀되 동네에서 논다.
    • 유리의 성은 생각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았다. 유리로 만든 오케스트라, 유리로 만든 유럽 스타일 도시, 정원에 가득한 유리 꽃과 유리 과일들, 유리 돌담까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이 가득하다. 유리 콩나물도 얼마나 귀엽던지 한참 구경했다. 내 눈에 유리 화장실이 제일 특이했다. 특수 유리벽으로 돼 있어 밖에선 보이지 않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이 훤히 보인단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볼일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 이후에 몇 군데 체험관을 더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워도 제주도가 무슨 대규모 체험 박람회도 아니고 하루에 몇 군데씩이나 가는 건 별로다. 경험상 하루에 몇 가지나 하는 체험은 결국 남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아는 데다, 제주도를 제주도답게 경험하고 기억할만한 방법은 얼마든지 더 있기 때문이다.
  • 아빠의 재발견
    • 당신의 최고의 장점이 뭔지 알아?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논쟁하되, 일단 사건이 벌어지면 책임 소재 묻지 않고 함께 헤쳐나가려는 자세야. 사실은 내가 어젯밤에 일기장에 당신 욕 썼거든. 미안해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달살기 "quote"

  • 처음 보는 아이와 친구가 되다
    • 그깟 나들이 좀 나왔다고 아이의 견문이 넓어지길 바라는 것도 웃기잖아. 아이의 24시간 유익한 것으로만 채울 수도 없고, 채울 필요도 없는데 왜들 그렇게 아등바등할까. 그냥, 즐거우면 되는 거 아냐? 그런데 어어? 막상 오니까 눈에 보일 정도로 뭔가가 변하는 거다.
    • 얼도탕도 않은 농담을 하거나, 투닥거리고, 시시껄렁한 무서운 이야기 따위를 하며, 사이사이 3분마다 한 번씩 싸우느라 웃느라 정신없다. 결국 "너희는 떠들어라, 엄마는 음악이나 좀 들어야겠다"하고 애 낳은지 9년만에 처음으로 나를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 그것도 클래식 채널. 푸하하
    • 아침 내내 점토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오늘은 뭐하고 싶니? 또 바닷가 갈까?" "아니, 도서관 갈래." 꽃님이가 제 입으로 도서관에 가겠다고 한다.
    • 평소 꽃님이를 보노라면 낯가림이랄까, 지나친 긴장이랄까 그런 부분이 있어 늘 걱정스러웠다. 만나자마자 금방 떠들썩하게 어울리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를 만나든 좋은 관계를 맺으라는 것도 아니다. 수줍음이 많거나 내성적인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꽃님이는 겉으로 보면 명랑하고 활발한 편이라서 낯선 사람 때문에 표정이 굳으면 상대방이 당황하는 것이다.
  • 아이들을 사로 잡은 건?
    •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면, 늘 예상과 어긋난다. 남들은 사진 한 장 찍으면 끝나는 곳에서 한 시간을 보낸다든지, 좋아할 줄 알았던 곳에선 언제 집에 가냐고 투덜거린다든지. 예상과 반응이 달라서 더 즐겁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 "자, 이제 엄마가 커피 좀 편하게 마시게 너희는 나가 놀지 않을래?" 아이들에게 색깔 풀을 꺼내 주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책을 읽고 쉬다가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꽃님이가 그린 바다의 색깔이 엄마의 촬영기술로는 잡아내지 못한 딱, 그 바다의 색깔이었다. 꽃님이와 꽃봉이가 제주도에 온 후 그림으로 엄마를 여러번 놀라게 한다. 둘다 만들기는 좋아해도 그리기는 썩 좋아하지 않았는데 시키지 않아도 여러 번 놀라게 한다. 둘다 보니, 새삼스레 여행이 아이들에게 굉장히 자극이 되는구나 싶다. 꽃봉이도 쓱쓱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 같지만 제목을 물어보면 그럴 듯하다. 오늘 그림의 제목은 '용암이 흐르는 언덕'이라나.
    • 엄마는 옛날부터 산도 숲도 바다도 싫었어. 그냥 보는 것만 좋고, 내가 그 안에 들어가는 건 싫었어. 덥도 힘들고 지저분해서 말이야. 그런데 아기를 낳고 나서, 그 아기에게 세상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그만 반해버린 거야. 나무도, 숲도, 바다도, 강도, 빗물도, 언덕도, 산도, 풀도, 벌레도. 너무너무 좋더라. 고마워 꽃님아. 꽃봉아. 계속 얼구 찌푸리지 않고, 금방 소라게와 고동, 작은 게에 반해줘서. 집에 가기 싫다고, 더 잡고 더 놀다 가자고 해서 고마워. 물에서 만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서 고마워. 금방 즐거워해서, 오늘 참 행복하다고 말해서, 내일 또 오자고 말해서 정말 고마워.
  • 일정 짜기 놀이
    • 여행에선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일상의 단조로움 따위는 없다. 쉴 새 없이 내가 무엇을 원하고 할 수 있는지 결정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 것 같다. 내가 한 선택을 쭉 모아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눈에 들어온달까?
    • 학교 다닐 때 단어장으로 많이 썼던 링 메모장. 일단 좋은 곳이 눈에 뛸 때마다 메모지에 썼다. 뒷장에는 근처 맛집이나 유의할 점 등을 쓴다. 특히 블로그 맛집 소개 같은 건 동네인지 금방금방 들어오지 않아서 일단 이렇게 적어놓는 것이 아주 유용했다. 가령, '어짓이네 횟집'이라고 하면 일단 보목포구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메모지에 쓴다. 그 후에 지도에 보목포구 위치를 확인한 후에 서귀포 파트에 메모지를 끼워 넣으면 되는 것이다.
    • 이렇게 좋은 곳을 잔뜩 써놓은 메모지 한 묶음으로 카드놀이를 꽤 자주 했다. 비가 올 때 갈만한 곳, 흐린 날씨에 가면 좋은 곳, 밤에 가면 좋은 곳, 이렇게 저렇게 나눠서 목록을 만든다. 그러면 제주도립미술관은 '1100도로 넘어가는 코스'에도 속하고, '비가 오는 날 가기 좋은 곳'에도 속한다. 아, '너무너무 더운 날' 리스트에도 넣었다.
    • 어른들끼리 다니거나 애가 좀 컸으면 비가 오건 말건, 덥건 말건 어지간하면 일정대로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릴 땐 이런 리스트가 꼭 필요하다. 엄마 생각엔 삼굼부리를 봤으니 가까운 비자림에 가면 좋겠지만, 아이가 잠들어버리면 어쩌겠는가. 한숨 재울 수 있게 한 시간쯤 드라이브하면 좋을텐데. 그럼 한 시간 쯤 떨어진 곳에 갈 만한 데가 있는지 찾아서 일정을 급하게 변경해야 한다.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면, 어른은 일정대로 구경을 다닐 수도 있고, 창 넓은 찻집에 가서 음악을 들어도 좋겠지만 어린 여행 파트너는 다른 일정을 요구한다. 실내이면서도 액티브한 곳이 어디 있을까? 그래, 유리의 성에 가서 컵 만들기 체험을 해야겠군. 이런 식이다.
    • 비오는 날 가기 좋은 곳
      • 제주 자연사 박물관, 유리의 성, 트릭아트 뮤지엄, 테지움 등 실내 테마파크, 해안도로 드라이브
    • 밤엔 뭐하고 놀까?
      • 해질녘 풍경 좋은 곳 - 사라봉, 차귀도, 송악산, 모슬포
      • 해 지고 나면 - 제주 별빛누리 공원, 탑동 공원에서 자전거 타기, 롯데호텔 화산쇼, 천지연 새섬 야경 보러가기, 극장 가기, 테디베어 뮤지엄(8시, 성수기 10시까지), 공룡랜드 야간 개장, 야간 개장하는 해수욕장은 협재, 이호 테우
    • 흐린 날을 놓치지 말자
      • 올레길 걷기(아이들이 걷기엔 5코스, 6코스 추천), 한라산 등반(영실코스가 제일 단거리), 성산일출봉 등반
    • 여행에서 정보는 양날의 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여행기와 여행지에 대한 정보 포스트가 다양하다 보니 개인으로 다니면서 패키지처럼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시간 낭비하지 않게 거리며 교통이며 다 고려해서 누군가가 딱 짜놓은 스케줄을 따라다니면 된다. 이러면 맛없는 음식점에 가서 기분 나쁠 일도 없고, 여행지에서 귀한 시간을 길바닥에 버릴 일도 없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고 읽는 추리소설도 아니고, 그런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의 여행을 복제한 여행이라니! 기껏해야 여행의 모험이란 게 가이드북의 저자와 나의 취향이 비슷한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 뿐이라니! 그나마 그 정보를 온전히 신뢰할 수도 없다.
    • 나는 캐릭터가 드러난 여행기를 좋아한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그 사람이 선택한 정보를 얼마나 받으들일 건지 선택할 수 있다. 아기 엄마에게 필요한 여행정보와 싱글남자에게 필요한 여행 정보는 완전히 다르니까.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읽는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자체를 추억하는 여행기도 그 사람의 개성이 드러난게 좋다. 하지만 요즘엔 예쁜 사진 한장에, 감상인지 철학인지 사춘기의 낙서처럼 몽롱한 여행기가 대부분이더라.
    • 자, 이제 내가 선택해야 한다. 가이드북의 정보를 따를 것인가, 나의 느낌을 따를 것인가, 무시할 것인가. 택시를 탈 것인가, 버스를 탈 것인가, 걸어갈 것인가. 돈을 선택할 것인가, 기회를 선택할 것인가. 여행에선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일상의 단조로움 따위는 없다. 쉴 새 없이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얷을 할 수 있는지 결정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 것 같다.
    • 내가 한 선택을 쭉 모아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눈에 들어온달까? 내가 취향에 따라 선택을 하고, 내 선택을 보고 내 취향을 안다. 나는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이 여행의 순간순간마다 일어난다. 여행의 루트를 짜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 체험 얼마만큼 할까?
    • 꽃님 아빠와 가장 같이 하고 싶은 일은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같이 보느 것이었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너무나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뛰어오는 모습을, 그 웃음 소리를 함께 듣고 싶었다. 최고의 노후 대책은 나중에 늙어서 우리가 그때 그랬지 하고 같이 추억하는 순간들을 만들어두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에라~.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지는 데 딱 24시간이 걸렸다.
    • 한때는 나야말로 각종 체험전시 마니아였다. 꽃님이가 다섯 살 때 가장 열심히 쫓아다녔던 것 같다. 아이에게 뭔가 살아있는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서 일주일에도 몇 군데씩 다니고 공연과 전시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꽃님이가 정작 은행을 가본 적도, 재래시장을 가본 적도, 우체국을 가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싼 돈 들여 직업 체험을 하고 있더란 말이지. 부침 개 부칠 때 한 국자만 떠 넣게 해도 충분히 좋아하는 걸, 엄마가 요리할 떄는 청소거리 생기는게 싫어서 텔레비전 틀어주고 엄마 근처에 오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주제에 돈 들여 요리 체험은 얼마나 많이 다녔던가. 엄마가 열심히 일상생활을 하고, 아이는 따라다니기만 해도 충분한 것을, 다만 엄가 아이의 눈높이에서 귀찮아하지 않고 설명해주고 보여주면 되었을 것을 왜 구태여 돈을 들여 따로 어딘가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 밀가루도 그저 만질 만하고 주물럭거릴 만큼이면 충분하지, 먹을 것도 모자란 판에 구태여 방 한가득 밀가루로 산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렇게 규모가 큰 즐거움에 익숙해지고 나면 아이는 더 이상 한 추먹의 콩으로는 즐겁게 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이후로 체험관은 거의 다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요새는 밖에서 놀되 동네에서 논다.
    • 유리의 성은 생각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았다. 유리로 만든 오케스트라, 유리로 만든 유럽 스타일 도시, 정원에 가득한 유리 꽃과 유리 과일들, 유리 돌담까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이 가득하다. 유리 콩나물도 얼마나 귀엽던지 한참 구경했다. 내 눈에 유리 화장실이 제일 특이했다. 특수 유리벽으로 돼 있어 밖에선 보이지 않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이 훤히 보인단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볼일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 이후에 몇 군데 체험관을 더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워도 제주도가 무슨 대규모 체험 박람회도 아니고 하루에 몇 군데씩이나 가는 건 별로다. 경험상 하루에 몇 가지나 하는 체험은 결국 남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아는 데다, 제주도를 제주도답게 경험하고 기억할만한 방법은 얼마든지 더 있기 때문이다.
  • 아빠의 재발견
    • 당신의 최고의 장점이 뭔지 알아?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논쟁하되, 일단 사건이 벌어지면 책임 소재 묻지 않고 함께 헤쳐나가려는 자세야. 사실은 내가 어젯밤에 일기장에 당신 욕 썼거든. 미안해